코이디아광장

목회 칼럼

> 코이디아광장 > 목회 칼럼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조각상이 있다. 한 남자가 자신의 신체를 알몸으로 드러낸 채 한 손으로 턱을 고이고 앉아서 무엇인가를 깊이 고민하듯 생각하는 조각상이다. 이 작품은 단테의 '신곡' 중에서 지옥 편에 나오는 것인데 지옥으로 들어가는 문 위에 만들어진 조각상이다. 그리고 그 조각상 아래에는 지옥문 앞에서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지옥문 앞에서 생각하는 사람', 이 작품이 던지는 메시지가 무엇인가? 과연 인생이 지옥문 앞에 이르렀을 때 거기서 무엇을 생각할 것 같은가?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생각의 내용보다 이미 생각의 때가 늦었다는 점이다. 죽음의 문에 이르러서는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해야 할 때 생각할 바를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조각상의 부제를 '때가 늦기 전에' 혹은 '살았을 때'라고 붙이고 싶다. 죽음에 이른 후회나 깨달음은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살아 있을 때,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영원이 보장된 진정한 기쁨과 행복이 가득한 삶은 어떤 삶인가?


현대인들은 고독, 외로움과 사랑의 굶주림, 그리고 영적인 갈증을 느끼고 살고 있다. 고독과 사랑의 굶주림과 영적인 갈증을 해소하면 행복과 기쁨이 가득한 삶이 찾아올 것이라 생각하고 노력한다. 그래서 돈을 찾아서, 세상의 쾌락을 찾아서 달려가 본다. 그러나 그곳에 참된 행복과 참된 만족이 없다. 사마리아 수가성의 한 여인이 고독과 사랑의 굶주림, 그리고 영적 갈증을 경험하고 있었다. 이것을 뛰어넘어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싶어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 여인에게는 남모르는 가책이 있었다. 그것은 양심의 가책이다. 죄의식이다. 그래서 사람이 많이 나오는 낮에 우물가에도 마음대로 나가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남편에 대해서 말씀하셨을 때도 남편이 없다고 말했다.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양심의 부담이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 한켠의 빈 구멍이 있었다. 세상의 쾌락으로도 세상의 재미로도 채워지지 않는 빈구멍이다. 세상의 명예로도 채워지지 않는다. 세상의 물질로도 채워지지 않는다. 채우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더 공허해지는 것이다. 이 죄의식은 내면세계를 사정없이 파괴 시켜 놓는다.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짓누른다. 애써 외면하려 해도 떠나지 않고 그 삶을 짓누른다. 평안을 뺏고, 기쁨을 뺏고, 용서와 이해를 잊어버리게 만든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 놀라운 변화가 생겼다. 행복과 기쁨이 가득한 인생이 되었다. 이 여인의 놀라운 변화는 예수님과의 만남 때문이었다. 행복한 만남이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행복과 기쁨이 가득한 인생이 되었다.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마다 행복과 기쁨이 가득한 인생이 된다.